소년공 뜻 | 소년공 이재명 | 소년공 대통령 | 소년공 다이어리
안녕하세요. 오늘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단어인 ‘소년공’의 의미와 그 역사적 맥락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연장선에서, 소년공 출신으로 훗날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 이재명 씨의 어린 시절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이재명 씨의 정치 입문 이전 삶, 특히 어린 시절 공장에서 일했던 소년공 시절은 어떻게 펼쳐졌을까요? 가난과 역경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았던 한 소년의 이야기를 블로그 스타일로 전해드리겠습니다.
소년공 뜻
‘소년공’은 말 그대로 소년(어린 나이의 아이)과 공(공장 노동자)의 합성어입니다. 주로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 산업화가 진행되던 대한민국에서, 어린 나이에 생계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 뛰어든 아이들을 일컫는 말이지요. 당시에는 초등학교를 갓 졸업하자마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곧바로 공장으로 향해야 했던 아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정식 직원으로 인정받지도 못한 채 보호 장치 없이 일을 시작했고, 어린 나이임에도 하루 종일 기계 앞에서 일하며도 아주 적은 임금을 받았습니다. 생각만 해도 참 안타까운 현실이지요.
한국 산업화 시대와 소년공의 등장
대한민국이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던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에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눈부신 경제 성장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성장의 이면에는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도시로 몰려든 수많은 노동자들이 있었고, 그 중에는 나이 어린 청소년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정부와 기업은 저임금의 노동집약적 산업을 급속히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종종 법정 최저 연령에 못 미치는 어린 아이들까지 공장 노동력으로 활용하곤 했습니다. 당시 노동법상 어린이의 노동은 제한되어 있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단속도 느슨했습니다. 그렇게 산업화의 그늘 아래 소년공이라 불리는 어린 공장 노동자들이 생겨났습니다.
특히 1970년대의 공장 지대에서는 흔히 ‘공돌이’, ‘공순이’라는 속어가 들릴 정도로 많은 10대 소년, 소녀들이 일을 했습니다. 원래 학교에서 공부하며 꿈을 키워야 할 나이에 이들은 가난 때문에 책 대신 기계를 마주해야만 했습니다. 일부 소년소녀들은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 중학교나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며 어렵게 공부를 이어가기도 했지만,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버스 차장(안내양) 같은 직업에도 10대 후반의 청소년들이 투입되는 등, 어린 나이부터 생계를 책임지는 모습이 사회 곳곳에서 나타났습니다.
1970년대 초에는 청소년 노동 현실의 참상을 고발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1970년, 청년 노동자 전태일은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어린 여공(女工)들의 현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살랐고, 그의 외침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만큼 당시 어린 나이의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은 열악했고,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였지요.
소년공들이 겪었던 현실과 어려움
그렇다면 당시 소년공들의 일상은 어떠했을까요? 어린 나이에 공장에 나간 아이들은 하루 대부분을 일을 하며 보냈습니다. 하루 10시간이 넘는 중노동도 예삿일이었고, 쉬는 시간도 충분치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성장기에 필요한 영양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 채 대충 끼니를 때우거나 굶주린 상태로 기계를 돌리는 일도 잦았습니다. 안전 장비나 교육도 부족해서, 위험한 기계를 다루다가 사고를 당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실제로 프레스기 같은 거대한 기계에 어린 노동자들이 다쳐 장애를 입는 일이 비일비재했지요.
또한 어린 노동자들은 정신적으로도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고, 공장 내에서 언제나 가장 낮은 위치에 있다 보니 힘든 일이 모두 그들의 몫이었습니다. 선배 노동자나 나이 많은 직장 상사들의 눈치를 보며 지내야 했고, 부당한 대우나 폭언, 심지어 구타를 당해도 어디 하소연하기 어려웠습니다. 한창 부모님의 품에서 보호받아야 할 나이에 사회에 내던져져 어른들과 똑같이 혹은 그보다 더 고된 노동을 견디는 현실은 어린 마음에 큰 상처와 두려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 시절 소년공으로 일했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너무 힘들어서 공장에서 일하다 울면서 잠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회고도 있을 정도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감당하기엔 그 노동 환경과 무게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하면 가슴이 아파집니다.
소년공 이재명
가난한 농촌 소년, 공장으로 향하다
이런 소년공의 시대에 이재명이라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이재명 씨는 1960년대 경상북도 안동군의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형제자매만 아홉 남매(5남 4녀)에 이를 정도로 식구가 많았고, 집안 형편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부모님께서 하시던 작은 사업이 실패하면서 가세가 더욱 기울었고, 어린 재명 씨의 유년 시절부터 생활은 팍팍했다고 합니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시절만 해도 학교까지 집에서 5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어 걸어서 다녀야 했는데, 형편도 안 좋고 몸도 힘드니 결석하는 일도 잦았다고 해요. 그럼에도 그는 초등학교 과정을 가까스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졸업 후 더 이상 정규 교육을 받는 것은 사치나 다름없는 일이었습니다. 먹고 살기 빠듯한 집안에서는 이제 막 어린 티를 벗은 재명 씨도 돈을 벌어야 하는 일손으로 여겨졌습니다. 중학교에 진학하고 싶어했던 그는 또래 친구들처럼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중학교에 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지만, “배고픔이 죄였다”고 회상할 만큼 그 시절 가난의 무게는 절박했습니다. 가족 모두가 생계를 위해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고, 열두 살 소년 이재명에게 돌아온 선택지는 공장 노동자, 즉 소년공의 길이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 이재명 가족은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경기도 성남시로 이주했습니다. 성남시는 당시 수도 서울 근교에 조성된 신흥 도시로, 각종 영세 공장들과 가난한 노동자 가정들이 몰려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재명 가족도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의 달동네 비슷한 곳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집이라고 해봐야 비좁은 방 한 칸에 식구들이 모여 사는 형편이었고, 화장실이나 수도 시설도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이재명 씨의 어머니는 어린 막내아들이 공장으로 나가는 것을 차마 보고 싶지 않아 눈물을 훔치면서도, 가난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며 마음을 굳히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남에 올라온 후에는 성남시장의 공중화장실을 청소하면서 휴지를 파는 일을 병행해 겨우 생계를 꾸릴 정도로 고단한 삶을 살았습니다. 시장에서 장사치들이 버리고 간 시든 채소나 썩은 과일을 주워 식탁을 차릴 때도 많았다고 하니, 가족들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어머니는 늘 아들을 걱정하며 안쓰러워 했지만, 결국 생계를 위해 어린 아들을 공장에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소년 이재명은 곧바로 공장으로 나서야 했습니다. 만 12~13세의 어린 나이에 사회로 내몰린 것이지요. 가족의 생계를 조금이나마 보탤 수만 있다면 뭐든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는 낡은 작업복을 걸치고 성남 상대원 공단의 한 작은 공장에 들어갔습니다. 처음 공장에 출근하던 날, 어린 재명 씨의 마음에는 두려움과 낯설음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웅웅거리는 기계음, 기계에서 풍겨 나오는 기름 냄새와 쇠 냄새, 그리고 바쁘게 움직이는 어른 노동자들의 거친 목소리… 이 모든 것이 그에게는 전혀 새로운 세계였지요.
성남 공단에서 시작된 소년공 생활
이재명 씨가 처음 일하게 된 곳은 시계 부품 공장이었습니다. 작은 시계 부속품을 만드는 공장이라 했지만 작업 환경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화학 약품 냄새가 코를 찌르는 실내에서, 보호 마스크 하나 없이 독한 세척용 용제를 다뤄야 했습니다. 어린 그가 맡아야 했던 일 중에는 시계의 금속 부품을 약품으로 세척하거나 도금하는 공정이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나오는 독한 화학물질 때문에 그는 후각을 잃는 후유증까지 겪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그때 독한 약품을 오래 맡아서인지 지금도 냄새를 잘 못 맡는다”고 털어놓은 적도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몸에 해로운 환경에서도 어린 소년은 어쩔 도리 없이 버텨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루 벌지 못하면 그만큼 가족이 먹을 끼니가 줄어드는 형편이었으니까요.
시계 공장에서의 일은 고되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몇 년 뒤 이재명 씨는 야구 글러브를 만드는 공장으로 옮겨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 공장에서는 커다란 프레스 기계로 가죽을 찍어내는 작업을 했는데, 이곳에서 그의 인생을 바꿔 놓는 큰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아직 십대 중반이 채 안 된 어린 나이에, 위험한 프레스 기계를 다루던 그는 작업 도중 기계에 팔이 끼이는 끔찍한 사고를 당했습니다. 순식간에 기계가 그의 팔을 짓누르고 지나갔고, 주위에 있던 동료들이 허겁지겁 기계를 멈추고 그를 빼냈지만 이미 한쪽 팔은 심하게 다친 후였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채 병원으로 옮겨진 어린 노동자는 극적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그 사고로 왼팔(한쪽 팔)에 영구적인 장애를 안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어린 나이에 겪은 산업재해였지요.
이렇게 크게 다치고 나서 이재명 소년도 마음의 좌절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직 어린데 평생 팔을 쓰기 어려운 장애를 얻었다니, 얼마나 막막하고 절망스러웠겠습니까. 게다가 산업재해를 당했다고 해도 당시 영세업체들은 산재 보상이나 치료 지원도 제대로 해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고 후 그는 한동안 일을 할 수도 없게 되었고, 집안은 더욱 경제적으로 어려워졌습니다. 공장에서 사고로 장애까지 얻게 되었지만,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 없이 어린 노동자 본인과 그의 가족이 그 고통을 온전히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렇듯 육체적 고통도 컸지만, 공장 생활 자체의 심리적 어려움도 그를 힘들게 했습니다. 공장에는 자기보다 몇 살 위인 십대 후반의 형들과 이십대 청년들도 있었지만, 어린 나이의 이재명에게 친한 또래 친구도 생겼습니다. 비슷한 또래로 일하던 소년공들끼리는 힘든 속에서도 서로 의지하며 버티곤 했지요. 학교에서 만난 친구는 아니지만, 어쩌면 그들에게 공장은 또 하나의 학교이자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훗날 이재명 씨는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은 없지만 공장에서 함께 일한 친구들이 평생 동창이나 다름없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그가 소년공 시절 사귄 친구 중 한 명은 자라서 소방관이 되고, 또 다른 친구는 자영업을 하게 되었는데 지금까지도 연락하며 지낼 정도라고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나이 많은 형들, 이른바 ‘선배 소년공’들은 어린 이재명 씨를 다정하게 챙겨주기보다는 호되게 대할 때가 많았습니다. 하루하루 일하느라 예민해진 탓인지, 어린 막내 노동자였던 그는 종종 그들로부터 구타와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서툴게 일한다고 혼이 나고, 힘들다고 표정이라도 찡그리면 “투정 부린다”고 야단맞기 일쑤였습니다. 잘못도 없는데 어른들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매를 맞은 날도 있었다고 하니, 어린 마음에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러나 울면서도 도망칠 수 없었던 것은, 그나마 그 일자리라도 붙잡아야 가족이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시절 이재명 소년의 머릿속에는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훗날 그는 “나의 어린 시절은 참혹했다”라고까지 표현했을 정도로, 그 시절의 기억은 고통으로 가득했지요.
위험과 고된 노동 속에서도 자라난 꿈
하지만 그렇게 어둡기만 할 것 같던 소년공 시절에도, 이재명 소년의 마음 한구석에는 작은 꿈의 불씨가 살아있었습니다. 비록 현실은 매일같이 힘든 노동의 연속이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공부를 해보고자 하는 의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공장에서는 막내였던 그를 향해 “배운 것도 없는 게 어디서 잘난 척이냐”는 핀잔이 돌아오기도 했지만, 그는 일을 마친 후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서도 틈틈이 책을 펼쳤습니다. 낮에는 기계 소리에 시달렸지만, 밤이 되면 교과서와 문제집의 글자가 그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그 사고 이후 특히 그는 공부를 통한 탈출을 더욱 간절히 꿈꾸게 된 듯합니다. 다친 팔을 바라볼 때마다 “내가 계속 공장에만 있었다면 아마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에 자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길로 나아가야겠다”는 결심도 자연스럽게 생겼겠지요. 가족에게는 “몸이 아파 당분간 일 못 한다”고 했지만, 그는 그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습니다. 병원 치료와 집에서 요양을 하는 동안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글씨를 쓰는 것도 힘들었지만, 그는 머릿속으로 수없이 되뇌며 공부했습니다. 중학교 과정의 검정고시 교재부터 고등학교 과정의 책들까지, 독학으로 하나씩 풀어나갔습니다.
물론 중학교조차 정식으로 다니지 못했던 그에게 고등학교 수준의 공부를 혼자 해낸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낮에는 통증 때문에 괴롭고, 집안일도 거들어야 했지만, 밤을 새워서라도 공부했습니다. 어느 누구 하나 공부하라고 등을 떠민 것도 아니었고, 제대로 된 스승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주경야독(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한다는 뜻)의 자세로 그는 조금씩 꿈을 현실에 가까워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밤늦도록 깜빡이는 등잔불 아래 책을 붙들고 있는 모습을 안쓰럽게 지켜보셨다고 하지요. 아마 속으로는 “이 녀석이 얼마나 고생인가”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대견한 마음으로 더 나은 미래를 빌어주셨을 것입니다.
그 결과 이재명 씨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졸업 학력 인증(검정고시)을 차례로 통과하는 놀라운 성취를 이룹니다. 정규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시험을 치러 합격함으로써, 마침내 고등학교 졸업자와 동등한 학력을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가족들도 모두 기뻐했지만 무엇보다 본인에게 큰 자신감이 되었겠지요. “나도 하면 된다”는 믿음을 갖게 된 그는 멈추지 않고 더 높은 목표에 도전했습니다.
주경야독의 결실, 그리고 새로운 시작
검정고시에 합격한 이재명 씨는 이제 대학 진학이라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됩니다. 주변에서는 “형편도 어려운데 대학은 무슨 대학이냐”는 만류도 있었지만, 그는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면 꼭 대학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마침 여러 대학 중에서도 중앙대학교 법학과는 성적 우수자에게 장학금 지원이 많기로 유명했습니다. 이재명 씨는 그 점에 희망을 걸고 열심히 시험을 준비하여, 결국 중앙대 법대에 당당히 장학생으로 합격하는 쾌거를 이뤄냈습니다. 어린 시절 공장에서 기계를 돌리던 소년이 이제 대학 캠퍼스에서 책을 들고 다니는 청년이 된 것입니다.
대학생이 된 이재명 씨는 누구보다 학업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배움의 기회를 간절히 바라왔다가 얻은 만큼, 하나라도 놓칠 수 없다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대학에서는 법학을 전공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넓어졌습니다. 특히 대학 시절 접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실은 그에게 큰 충격과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조리한 세상의 단면을 몸소 경험해온 그는, 책을 통해 또 현실 사회의 이야기를 통해 “정의란 무엇인가”, “사회적 약자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 억울함을 겪지 않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가슴 한켠에 자리잡게 된 것도 이 무렵이라고 합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바로 사법시험(지금의 변호사시험 격에 해당하는 국가 시험)에 도전했고, 1986년에 당당히 합격하여 법조인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사법연수원에서 교육을 받으며 훗날 대통령이 되는 고(故) 노무현 변호사의 강의를 들었던 것도 인상 깊었다고 합니다. 노무현 변호사는 “억울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말라”는 취지의 강연을 했고, 그것이 이재명 씨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고 하지요.
사법연수 과정을 마친 이재명 변호사는 판사나 검사가 아닌 변호사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것도 돈과 명성이 보장된 큰 로펌이나 서울의 법조타운이 아니라, 자신이 자라온 성남 지역에서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난한 이웃들과 노동자들의 편에서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권리를 지켜주는 일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린 시절 자신의 가족과 자신이 겪었던 어렵고 서러운 경험들이, 누군가에겐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돕겠다는 다짐이 있었을 것입니다.
변호사로서 이재명 씨의 행보는 자연스럽게 사회 운동과 지역 시민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성남의 개발 문제나 의료시설 확충 문제 등 서민들의 삶과 직결된 현안에 목소리를 내며, 조금씩 지역 사회에서 이름을 알리게 되었지요. 그렇게 현장에서 부딪치며 억강부약(힘을 억제하고 약자를 돕는다는 뜻)의 신념을 실천하던 그는, 결국 정치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2000년대 중반에 공식적으로 정치에 입문하여 성남시장 선거에 도전한 것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많은 분들이 언론을 통해 아시는 바와 같이,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를 거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정치인 중 한 명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런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으려는 듯, 2017년 대선에 출마 선언을 할 때에는 특별히 자신이 한때 일했던 성남의 시계공장 터를 찾아가서 선언식을 열기도 했습니다. 소년공 시절의 자신을 기억하며 초심을 다지겠다는 의미였지요.
마무리하며
돌이켜 보면, 소년공이라는 단어는 한국 현대사의 아픈 그림자를 상징합니다. 이재명 전 성남시장(현 정치인)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그 그림자 속에서도 피어난 한 송이의 꽃과도 같습니다. 절대 넘을 수 없을 것 같던 가난과 역경을 딛고 스스로 길을 만들어나간 그의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포기하지만 않으면 언젠가 기회가 온다”는 말을 몸소 증명해 보인 셈이지요.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는 초등학교는 물론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 실시되고 있고, 어린 아이가 공장에 나가 일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나라가 발전하면서 아동 노동은 엄격히 금지되고, 어린이들은 학교에서 공부하며 꿈을 키울 권리를 보장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재명 씨가 자랐던 세대에는 그런 기본 권리조차 사치였던 아이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얼마나 빠른 시간 안에 그만큼 성장했는지도 되새기게 됩니다.
이재명 씨의 소년공 시절 이야기는 단순히 한 정치인의 과거 담담한 기록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함께 겪어온 성장통의 한 단면입니다. 동시에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면 결국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그의 삶을 통해 많은 분들이 용기와 위안을 얻었다고 하지요.
끝으로, 과거 한국의 ‘소년공’들을 떠올리며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어딘가에서는 가난 때문에 학교 대신 일터로 내몰리는 아이들이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어린이가 가난을 이유로 꿈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누구나 기본적인 교육과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이야기가 여러분께 작은 울림이나마 전해졌으면 합니다.